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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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의 초심닦기(14) - 위선환

오선민 2010. 6. 9. 00:50

ㅇ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여 놀이를 하는 자이다. 시인에게 언어는 장남감일 수 있고 언어라는 장남감을 가지고 놀이에 빠진 시인은 이미 현실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본원적 자유를 획득한 것이 된다.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노동으로 뭔가 생산하는 데 있지 않고 놀이를 통해 즐거음을 얻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놀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고 놀이는 물리적 법칙을 벗어난 이상세계로서의 의미를 지닌 활동이다.
시인이 언어를 통해 만들어내는 시의 세계는 그 자체로서 순수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희적 시어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세계에서 순수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존재의 무질서함과 혼란스러움을 넘어선 존재의 질서와 조화로움을 찾으려는, 억압 받는 자들의 현실개조의 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속적인 현실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놀이의 세계로 창조되는 시의 공간은 기괴하기도 하고 해학적이기도 하지만 권태로운 일상이난 억압적인 현실에서 맛볼 수 없는 자유로움을 준다.

- 이양현 / <시와셰게>2008년 겨울호


ㅇ......마침내 이만식은

아. 10월 11일
어느 10월 11일
그녀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이라고 말하며 시를 끝낸다. 결국 죽은 그녀와 나는 이 시에서 동일시된다. 이런 동일시는....

이승훈/ 해체시론/ 마은 남고 글은 날아간다 에서


ㅇ 안 먹으면 배고프고 먹으면 배고파지는 아귀의 역설을,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서 읽은 적 있다. 시마(詩魔)의 역설로 바꾸면, 안 쓰면 허기지고 쓰면 더욱 허기진다는, 쓸수록 원하는 바에 못 미쳐 목마름과 허기만 가중되어서, 더욱 배고파져서 쓰고 또 쓰게 되니까.
이미지든 무의미든 앵포르멜이든 해체든..... 모두는 나와 상관없다는 반시론(反詩論)을 시론으로 삼아 자유롭다.
어떤 시론에도 갇히지 않아, 편마다 최적최선(最適最善)의 유일무이(唯一無二)이기를,
편편이 개체발생(個體發生)과 계통발생(系統發生)에서 절연된 태초의 창세기(創世記)이기를, 비록 태초의 혼돈에 불과할지라도 태초의 아담이기를,
따라서 어떤 타성도 싹틀 수 없게 , 접신(接神)을 위해, 처음보는 낯설고 엉뚱한 것이 태어나도록,
안다는 것들을 다 지우기 위해, 모든 실험을 다 해본 결과가, 한 기슭에 만발한 온갖 야생 꽃밭이 한 권의 시집이기를,
물론 영원히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예측 불가능한 미정(未定)의 미지(未知)의 'beyond here and now' 가 지향일 따름이다.

- 유안진 /<학산문학> 2008년 겨울호


ㅇ 시’는 ‘최소한’의 언어로 만드는 세계다. ‘최소한’이라는 말 속에 시라는 장르가 가지는 핵심이 들어 있다. ‘최소한’의 세계는 구체적이고 명확하지 않으면 구축되지 않는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자세히 보거나 골똘히 생각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시가 아주 작은 것까지 또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명확하다’는 것은 모든 과장을 제거해도 끝내 없어지지 않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부풀리는 방식이 아니라 걷어내는 방식을 통해 시의 언어는 가장 멀리, 가장 깊이까지 도달하는 경이를 이룩한다. 우리가 시를 읽으면서 본질에 닿는 감동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명확한 세계를 구현하는 시의 언어는 소위 ‘타고 나는 것’이라는 것은 정말 오해다. 몸의 근육처럼 정신도 사고 훈련을 통해서 개발된다. 발전한다. 그러므로 좋은 언어를 갖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라는 물리학자 아르망 트루소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본질은, 세계는 정확하고 명징한 것이다. 복잡함을 뚫고 들어간 그곳에 끝내 남겨져 있는 것, 시라는 ‘최소한의 언어’는 거기에 존재한다.

- 문지문화원 '사이' 게시글에서(이 원)


ㅇ 안도현입니다-2008년의 끄트머리에 서서
보낸날짜 2008년 12월 08일 월요일, 오후 14시 15분 24초 +0900
보낸이 안도현
받는이 yago30@hanmail.net 추가 주소추가


최근에 꽤 오랫동안 저는 시인으로 사는 일이 무엇인가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시인으로서 저는 크게 고장이
나서 망가져 있었습니다. 저는 고독한 이방인도 되지 못했고, 영원한 자유인도 되지 못했습니다. 골방에서
자족적인 자폐를 혼자 즐기지도 못했고, 광장에 서서 세상에 분노하면서 크게 외치지도 못했습니다. 음풍농
월의 세월도 저를 비껴갔지요. 매일매일 일정표를 자주 들여다보았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기에 귀를 대야
했고, 원고마감에 쫓겨 허둥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를 저 스스로 무겁게 떠받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항복합니다. 여기에서 항복하지 않으면 곧바로 시가 실패할 것이고, 그러면 최소한의 떨림조차 없는 시인으
로 남을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다짐합니다. 지금까지 약속한 일정 이외에 2009년부터
는 강연, 독자와의 만남, 사인회, 시낭송회, 문학기행과 같은 외부행사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신문이나 잡
지에 산문을 쓰는 일, 인터뷰를 하는 일, 방송에 출연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남의 책 뒤표지에 저의 못
난 이름을 걸치지 않겠습니다. 이 홈페이지도 내년 봄 산수유 필 때쯤에는 닫겠습니다.
여기에 구차하게 이런 목록들을 굳이 적는 것은 이렇게라도 해야 저를 단단히 묶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입
니다. 그동안 좀머씨처럼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사실 많았습니다. 용서해주시
기 바랍니다.
그 대신에 더 몰두해서 시를 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 오랜 시간을 빈둥댈 것이며, 더 많은 길을 천천히 배회
하겠습니다.

2008년 12월 9일

안도현



ㅇ풍경은 시각과 주체가 대상들과 관계 맺는 방식의 반영으로서 보는 방식에 의해 시각적 주체는 구성된다. 사물이 대상으로 옮겨 앉는 자리에서 풍경은 탄생하며, 그 풍경 속에서 대상들은 주체의 사유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배치된다. 주체의 사유는 사물을 대상화하는 표상(재현) 행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그리하여 자연풍경은 소재에 대한 주체의 단순한 친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세계 인식의 구체을 드러내는 형상이 되는 것이다. 세잔이 20년 가까운 시간을 생트 빅투루와르산에 매달렸던 것도 바로 사물을 대상화하는 방식, 즉 인식의 문제 때문이었다. 자연은 주체의 표상 방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연을 주체의 주된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자연친화를 말하는 것은 별로 적절하지 않은 지적일 수 있다.

- 김문주/ <시인시각> 2008년 겨울호


ㅇ 나는 한 번도 내가 인간이 아니란 걸 의심해 /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이 사실을 알지 / 못하고 있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기계들 / 의 사랑은 때로 인간보다 훨씬 아름답다

(조하혜의) '인간의 사랑' 후반부이다. 이 시에는 부제가 "기계도 오르가즘을 느낀다"로 되어 있다. 각주에서 조하혜는 원래 이 시의 제목을 '기계들의 사랑'이라고 할 것을 '인간의 사랑'으로 바꾸어 달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시가 말하는 것은 기계들의 사랑인가? 각주만 없었다면 '인간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각주가 나오기 때문에 이 시는 인간/기계의 사랑이 된다. 각주의 미학이다.

- 이승훈 / <문학사상> 1996년 1월호



ㅇ 가끔 멋모르고 김 시인(김영남 시인)이 차 안에서 책이라도 읽을라치면 선생은 예의 농기 가득한 얼굴로 "아이고 잡것!....진짜 공부 거리는 밖에 있구먼...."하고 핀잔을 주곤 하셨다. 한번은 장흥 땅에 들어서자마자 선생이 지금 약 먹을 시간이라며 문을 활짝 열자고 하셨다. 우린 혹 선생이 먼 길에 차멀미를 하시나 싶었다. 약간 어리둥절하여 무슨 약을 드시나 싶어 궁금했는데, 그 약이란 다름 아닌 시골의 맑은 공기였다.

- 김선두/ 이청준, 나의 예술적 고향/ <문학과 사회> 2008년 겨울호


ㅇ 저는 비평을 통해 서정성과 실험성과 현실성이 서로 만나고 겹치고 스미는 접점과 공유면을 발견하고자 하였습니다. 좋은 시는 서정과 환상, 자기 동일성과 타자성, 사회적 현실성과 실험적 모험성을 상호 배타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자기 몸에 하나로 끌어안고 나아갑니다. 이 전진의 순간이야말로 시적인 것이 발생하는 차원이며, 이 순간을 지속할 때에만 시가 생성되고 시인이 존재합니다. 이 순간을 지속하는 동력이 멈출 때, 그저 평범한 서정시나 평범한 환상시가 생겨나게 됩니다.
전진의 순간을 지속하는 동력을 전위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앞에서 한 말은 실험적 전위시 뿐만 아니라 서정적 전위시도 존재한다는 말과 상통할 수 있습니다. 이말은 서정시든 실험시든 전위성을 발휘하는 작품은 좋은 시이며, 이런 서정시와 실험시를 사랑한다는 저의 애정 고백입니다.

- 오형엽 / 제6회 애지문학상 비평부문 수상 소감/ <애지>2008년 겨울호


ㅇ 따지고 보면 구래의 서정시 역시 결핍의 자리에서 출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서정시를 가득 채운 동일성의 욕망은 주체의 결핍을 메꾸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주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시적 주체는 세계를 자기의 욕망 아래에 폭력적으로 귀속시킨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자면 주체는 결여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결코 획득될 수 없는 대상('대상원인', object a)을 욕망하는 것이 된다. 요컨데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결여를 메우기 위한 불가능한 예술형식이 아닐 수 없다. 대상과 주체의 완전한 합일은 불가능하며, 가까스로 그 '차이'를 지운다 할지라도 '영원한 현재'라는 수사가 붙을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일순간에 제한된 환상일 뿐이다. 하여 시는 '순간적 장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최근의 시들은 어떠한가. 주체의 결핍 뿐만 아니라 주체의 허상을 자각함으로써 동일성의 욕망으로부터 이탈해나가는 징후를 뚜렷하게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구래의 서정시를 낡은 서정시로, 서정적 주체를 1인칭의 폭력적 주체로 단죄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한 '미래파'논란은 주체의 본질에서 비롯된 논쟁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이제 서정시 역시 서정적 주체에 대한 자의식을 지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래파 논쟁은 서정적 주체의 균열과 분화를 촉발함으로써 한국 서정시의 질적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을 터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서정시는 두 갈래의 지류로 나뉘게 된다. 첫째, 주체의 결핍에 대한 자의식으로 말미암아 세계와의 동일성 욕망을 균열시키고 무회시키는 시, 둘째, 여전히 세계와의 합일과 동일성의 욕망을 추구하는 시, 그간의 사정을 돌이켜볼 때 동일성의 시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으며, 한국 시단은 주체와 동일성의 균열이 주는 새로운 매혹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대현 / <현대시> 2008년 11월호


ㅇ 어제 문구가 자신의 심경을 쓰겁게 고백했다. 그 무엇을 쓸까를 자주 자문한다 했다. 글이 전혀 안 써진다 했다. 차라리 입산수도나 하고 싶다 했다. 사실 문구가 글 안 쓴 지는 꽤나 된다. 나 역시 절필을 생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때 박경리는 사위가 감옥행에도 불구하고 정사각형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의 고행을 이어가고 있다.
절필의 의미!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된다. 60년대 신동문이 시를 그만둔 것에 나는 한동안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시인의 중단이나 무능에 견주면 박경리 쪽이 더 문학에 치열하다. (중략)
문구야
문구야
그리고 고은아
너희는 부디 문학 없는 문학으로 건달이 되지 말지어다.
쓰는 자만이 옳다. 쓰는 자만이 세다. 쓰는 자만이 사는 것이다. 술마시고 써라. 씹히고 나서 써라. 두 손 잘리면 남은 팔뚝으로 써라.
내시 처선, 연산군이 마구 잘라도 할 소리 하며 죽어 갔다.
목잘리면 몸통으로 굴러가며 써라.
문학은 온몸의 각 부위가 다 하는 것이다.

- 고은/ 1976. 4. 4. 일기에서 / <문학사상> 2008년 11월호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글쓴이 : 장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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