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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창작강의 및 문학이론

[스크랩] 시의 초심닦기(15) - 위선환

오선민 2010. 6. 9. 00:50

ㅇ 말은 원래 어머니한테 배우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환경에서도 독립해있는 어머니가 젖먹이 때부터 아이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아이는 최초의 (절대적인) 말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야생의 말이다.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흐르는 말의 물길을 외국에서는 모국어라 부르지 않고 母語(엄마말)라 부른다. 영어권에서 쓰는 Mother tounge, 독일어권에서 쓰는 Mutter Sprache가 그것이다. 아이가 배우는 말은 원래 있던 순수한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엄마와 말 사이에 나라가(國)가 끼어들었다. <모국어>라는 말이 주는 어머니같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미처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사라져버린 <모어>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끼는 언어 환경에 우리는 지 금 숨 쉬고 있는 것이다. ......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나날의 생활 가운데서 얻은 자연스러운 언어가 획일적이고 정태적인 국가언어(제도언어)에 수렴되어가는 근대사의 폭력적인 과정을 살펴보는 일이 의미 있는 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자연언어와 문법언어의 관계에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올바른 언어학에서 본다면 교정해야할 사투리가 표준어보다 더 옳은 것이다.

- 허만하 / 현대시학 2009년 5월호


ㅇ시의 대화적 성질에 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시인으로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 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언어의 기본구조를 어떤 경우에도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무엇에 대하여 말한다>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기본구조가 사유의 구조 그 자체라 믿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노로그의 가능성은 언어의 본성 자체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다. 그는 사유를 내가 내 안의 또 하나의 나와 대화하는 것이라 말한다.
발레리는 사유와 언어를 하나로 본다. 이 견해는 메를로-퐁티의 언어론과 일치한다. 발레리에 따르면 두 개의 <내>가 있는 것이다. 이 두 개의 <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내 안에서 먼저 말을 거는 <내>가 말에 귀 기울이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관계가 양자 사이에 성립해 있는 것일까? 혹은 역으로 모르는 무엇을 물어보는 것일까? 우리들은 언어를 타자한테서 배우기 때문에 타자는 언어의 원천이 된다. 타자가 어머니인 경우를 우리는 <모어 >( mother tongue) 라고 불렀다. 타자가 자신을 가리키며 <나>라고 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일인칭 단수 주격인 <나>를 배우게 된다. 그러한 <나>가 <내> 안에 둘이 있으며 그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나의 사유과정이란 것이 발레가 말하는 사유와 언어의 불가분론이다. 언어의 대화적 성격을 말하는데 있어서 발레리는 바흐진 보다 관념론적인 면에서 오히려 더 과격한 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 허만하 / <현대시학> 2009년 7월호


ㅇ 나의 예술에 있어서는 신이 타인들 보다는 나에게 가까이 있슴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두려움 없이 신과 사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신을 알며 또 인정하고 있습니다.
음악은 정신생활을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입니다. 음악은 예지의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유일한 비육체적 입구이며, 모든 정신을 포괄하는 것이며, 정신을 그 높은 목표의 기초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감정이 하나의 정신적 귀의를 이룰 때 상상력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예술은 언제나 또는 모든 신성한 것의 대신이 되는 것이고, 이런 신성한 것과의 인간적인 관계가 종교인 것입니다. 이 종교를 우리는 예술을 통하여 얻으므로 예술은 신이 내리신, 인간이 도달한 어느 목표에 대한 암시입니다. 즉 자기의 현현에 의하여 신성한 것으로 돌아가고 또는 인간에게 있는 신성한 것을 매게로 하여 창조되어 지는......,

- 베에토벤


ㅇ 2000년대에 서정시가 호출되었다면 주관적인 감정의 분출이나 낭만적인 감수성과 같은, 유서가 깊은 자아의 감정을 강조하는 뜻이 담겨있을 것이다. 이때의 서정시는 장르의 중심에 있는 시를 뜻한다.
2000년대의 서정시인들은 어리둥절하다. 중심을 오랫동안 지켜왔던 시라면, 전통과 역사가 강조될 터인데, '2000년대의 서정시'는 계승보다는 차이를 전제로 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래서 자신들의 서정에, 전통의 계승보다는 갱신과 부정의 뜻이 더욱 짙게 베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전의 시 영역의 중심 자리를 지키면서, 전대와는 다른 색채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시인이다. 그들은 전대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당대 스스로 주변에 배치한 시들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되었다. 2000년대에 '새로운 감각들'의 시가 출현하였고, 이들을 묶는 비평적 시도가 있었고, 이들은 반향을 일으켰다. 시 비평은 이들에게 여러 이름을 선사하였다. 각개의 영역이 형성되자 중심이 자각되었고,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시들은, 이들을 주변에 배치하고자 했다. 이것은 위기에 대한 대응이었다. 효과적인 방법은 시의 중심을 면면히 지켰던 '서정'이란 말을 서둘러 소환하는 것이었다. 유래가 깊지 않은 '전통서정'이라는 말에 힘이 실린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모였으나, 그들이 확인한 것은 남루한 현실이거나 커다란 위기였다. 주변에는 힘 센 새로운 감각의 시들이 있고, 발밑을 바라보니 서정의 발원지가 결딴나 있다. 모종의 다급함과 위기감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들은 이분법적 구도를 다시 설정해서 주변의 위기를 막으려 했고, 결딴난 세상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길을 모색했다. 앞의 길은 비평이 주로 택했고, 뒤의 길은 시인들이 주로 택했다.

- 김종훈 / <열린시학> 2009년 봄호


ㅇ 다만 나는, ......그 장르 혼종의 형식실험들이 다소 편리한 방식의 다성성의 카니발, 또는 지나치게 세련된 인공적 기교로 나가지 않을까 두렵다. 더 나아가 이 기교가 극단적 형식주의로 함몰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형식화가 번잡할 때는 다시 무의미가 입을 벌린다. 그 무의미의 아가리에 떨어졌을 때, 의미는, 내용이 형식에서 해방되어 소박한 상태로 복귀하는 운동속에서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김상환 '大過 시대의 글쓰기, <창작과 비평 > 2008년 겨울호)라는 한 철학자의 예언적 진술은, 나의 염려가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유력하게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진술은 '기담'뿐 아니라 형식실험에 골몰하는 우리 시대 모든 시집이 참고해야만 할 어떤 예지를 간직한 것 같다. 형식실험이 몸이 아플 것 같은 무서운 전율과 이 세계의 상투성을 근본부터 뒤흔들어버리는 어던 '공백'의 순간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상투화된 파괴와 혼종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율과 공백의 순간은 자신의 실존 전체를 걸고 격투하는 시인의 '충실성'을 통해서만 현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찬 / 김경주 시집 '기담' 에 붙인 글에서 / <창작과 비평> 2009년 봄호


ㅇ 대전서 발간하는 시 旬報 '冬伯'은 모두 아담한 시가 많았다. '모래언덕 하여헌 해거름에('白旗' 1절) ' - 해거름은 해그름의 誤植이리라. 해그름이란 아름다운 말이다. 해질 무렵에 오는 어두운 運命의 豫感 같은 게 서리서리 어렸는 말이다. 같은 사투리로서 경상도의 저녁답은 저녘녘이라는 뜻, 어둡사리는 어두움이 처오는 모양의 사투리, 사리라는 게 엷은 어두움의 가냘핀 모습이 방불할 것이다.(박목월의 木月詩話 중)

이내 오는 해거름
산이 저물고 - '松뢰' 중-

머언 山 오리木 산ㅅ길로
살살살 날리는 늦가을 어스름 - '가을 어스름' 중 -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 '牧丹餘情' 중 -

情은 萬里
해으름 千里 - '해으름' 중 -

하양 해질 무렵의 그 길고 느긋한 薄暮 - 진주행 중 -

는 모두 해그름에 기우는 그(박목월)의 심정을 보여준다. 낮과 밤의 뚜렷한 경계가 없는, 수채화의 번짐처럼 스며드는 하루의 쓸쓸함 같은 시간대를 박목월은 좋아했던 것이다.

1980년 10월 18일 속리산 법주사에서였다. 땅에 깔린 어둠을 손으로 퍼올릴 수 있을 것 같은 두께를 느낄 즈음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 서 있는 박목월 시인과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의 격려에 나는 '선생님, 이 즈음 시가 잘 되질 않습니다'라는 푸념을 늘어놓았던 것 같다. 목월의 대답은 ' 허형, 허형 시는 너무 도사리는 것 같아요. 나는 시가 잘 풀려지지 않을 때는 국어사전들 뒤지지요' 였다.

- 허만하 / 木月遺事.4 중 / <현대시학> 2009년 2월호


ㅇ 보편적으로 시를 읽고 감상할 때에 시 텍스트의 길이가 어떠냐에 따라 독자의 심리적 반응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선 시 텍스트가 길면 그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이 무엇일까 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시를 읽는다. 이에 비해 시 텍스트가 짧으면 그 텍스트의 내용(주제)보다는 구조와 형태, 그리고 각 시어들이 환기하는 이미지에 집중하며 읽는다. 전자의 경우에는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에 비중을 두게 되고 , 후자의 경우에는 언어 자체, 즉 이미지에 비중을 두게 된다. 그래서 전자는 흔히 리얼리즘 경향의 시가 되기 쉽고 후자는 존재론적 시가 되기 쉽다
.....다시 한 번 부연하지만, 존재론적 경향의 시적 언어는 의미를 지시해주는 도구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곧 사물 자체가 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존재론적 경향의 시는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드러내기보다는 이미지로서 그 대상을 환기하여 드러내게 된다.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들이 않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흔히 들여다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장석남. '길' 전문)

에서 볼 수 있듯이,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로 내려온 꽃잎들의 '길'은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기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길'에 대한 존재론적 상상력을 환기하고 있을 뿐이다.

- 정유화 / <현대시> 2009년 2월호


ㅇ 시에서의 윤리성은 시인이 도덕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가 당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의 당위성이란 시가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진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윤리적인 유혹'이란 표현이 참 멋있습니다.
유혹이란 어딘가에 끌린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지향성입니다. 내가 가고 그것이 오는 움직임이 지향성이죠. '여기'에서 '저기'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모든 문학의 근본원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시를 쓰는 것은 이 작품을 통해서 좀 더 나은 제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글의 내용이 어떤 하나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그 안에는 이런 욕심과 끌림이 함께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어 삶의 보편적인 면을 비춰줄 때, 이런 끌림이 활성화되지요.
저는 예전에 이것을 '초월'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저기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초월인데, 문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염원하는 목표일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내가 머무는 여기가 따로 있고, 문학에서 그리고 있는 저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기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여기와 저기는 이분법적으로 절대로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 여기'를 함께 끌고 가 동일한 지평의 '저기'에 닿아야 합니다. 그래서 김진석 같은 철학자는 초월이 아니라 '포월'이란 말을 썼습니다. 기어가듯 끌고 간다는 뜻이죠. 그래서 저기를 지향하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여기의 당대 현실을 버릴 수 없습니다. 당위성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능태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기에 충실한 여기를 저기로 함께 옮겨가는 것, 이것이 바로 윤리적 유혹이라 생각합니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아마 모든 시인들의 꿈일 것입니다. 자기가 쓰는 언어가 아름다움을 캐내는 도구로 쓰이기를 모두 희망할 것입니다.....
어떤 언어가 아름다운 언어일까? 말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운율 같은 외양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얼마나 잘 드러냈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모든 존재는 언어를 통해 규정됩니다. 따라서 언어가 진정으로 존재의 당위성을 가능하게 해줄 때, 그 언어가 아름다운 것이라 믿습니다. 또, 기존의 존재의미를 넘어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정말 뛰어난 시인은 거기에다 또 하나의 의미의 층을 얹지요. 이럴 때 언어의 아름다움은 빛납니다.
저는 일부러 시에서 예쁜 말을 쓰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제 시에는 거친 표현이 나오기도 하고 욕설이 나오기도 하지만, 저는 이것이 아름다움을 거스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투박함과 섬세함이 조화를 이루면서, 존재의 의미를 살찌울 수 있는, 바슐라르의 말대로 '여가 與價'를 할 수 있는 언어들이 아름다운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어가 존재에 충격을 주었을 때 존재가 흔들린다면 정말 멋진 언어가 되겠죠.

- 정한용 / 대담에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9. 1-2 월호


ㅇ 1962. 12. 3, 목월은 시인 박남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탁 받은 원고를 끝낸 뒤에 찾아든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전화였다. 서로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참에 박남수는 최근의 목월 작품이 '퍼졌다'는 진술한 평을 한다. 이 말을 듣고 목월은 최근에 발표한 그의 작품이 시적 표현에 대한 절박한 진실감이 부족하다고 자성한다. '절대적 표현'을 추구하는 박력이 모자란다는 자성을 그는 그의 일기에 쓰고 있다.

나의 작품은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여분을 가진 것이며 이 여분이야말로 시를 절대의 경지에서 타락시키는 가장 큰 위험물이다. 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한 마디의 말의 여분도, 부족도, 보충도 허락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목월은 완벽한 시를 위하여, 여분도, 부족도, 보충도 허용하지 않는 가차 없는 상태의 시를 상정하고 있다.

- 허만하 / <현대시학> 2008. 12월호


ㅇ 시가 팩트가 아니고, 이제 막 들려지는 새소리이고, 파도 소리이고,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의 주고받는 넉두리, 대화일지도 모르지요. 시는 책 속에, 교과서 속에 들어있지 않은 겁니다. 또는 시는 시 속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건 아주 비겁한 편법입니다. 시는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 심장 옆에 있습니다. 글자 속에 있지 않지요.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외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데카르트의 흉내를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 나는 울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외침 말이지요.

- 고 은/ <시와정신>2008년 겨울호


ㅇ '공감'은 본질적으로 소통을 전제로 한다. 진정한 소통의 감각은 공존의 방식을 이해할 때 가능하다. 각기 다른 서로의 경험들이 공존의 지평에 놓일 때, 그것은 보편적 감정을 획득한다. 특수한 경험들이 보편의 방식으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이유는 타자와 나의 삶의 동일성에 기인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다름과 차이가 이 세계의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원리임을 인정하는데 있다.

물질이 우리의 삶을 압도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꾸만 소외되고 위촉되곤 한다. 살풍경한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실종되고 그 위에 다른 것들만이 춤을 춘다. 사람이 관계의 줌심이 되지 못할 때,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수많은 가치와 신념들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사람살이의 풍경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그 각기 다른 풍경 속에 인간의 향기가 스며 있지 않다면 그것은 참담한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 강경희 / <서시)> 2008년 겨울호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글쓴이 : 장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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