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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외 2편) / 박형준 본문

좋은 시 감상

마차 (외 2편) / 박형준

오선민 2011. 7. 19. 18:06

마차 (외 2편)

 

   박형준

 

 

 

조선 국화가 성묘 끝난 무덤에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가족들이 서울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나는 신작로를 서성거렸다 첫서리가 내리던 날

신작로에 마차가 지나갔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지나갔다

그런 뒤

적막 속에서 서리 꺼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마부는 외투를 눈썹까지 끌어올리고

말은 반쯤 눈을 감고 신작로를 끄덕끄덕 지나갔다

꿈속에서

말발굽에 유성이 묻히는 소리

그 속에서 식구들이 모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덤 사이에서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워졌다.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얼음 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떠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 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 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고 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퍼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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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 「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춤』『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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