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외 1편) / 나희덕 본문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외 1편)
나희덕
손보다는 섬모가 좋다
인간다움이 제거된 부드러운 털이 좋다
둥글고 잘 휘어지는 등이 좋다
구불구불 헤엄치는 무정형의 등이 좋다
휩쓸고 지나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온순한 맨발이 좋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매순간 새롭게 생겨나는 위족이 좋다
때로 썩어가는 먹이를 구하지만
소화시킬 수 없는 것은 다시 내보내는 식포가 좋다
맑은 물에도 살고 짠물에도 살며
너무 많은 물은 머금지 않는 수축포가 좋다
물과 공기가 드나드는 투명한 막이 좋다
일정한 크기가 되면
둘로 쪼개지는 가난한 영토가 좋다
둘로 나뉘지만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아서 좋다
그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찾아온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끌어안았던 태고의 신비,
그 저녁의 온기를 기억해낸 것뿐이다
섬모와 섬모가 닿았던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문학동네》2011년 여름호
장미의 또 다른 입구
오늘은 장미 한 송이를 걸어보았습니다.
열세 개의 문을 통과했지요.
꽤 은밀한 구석이 많은 꽃이더군요.
한 잎 한 잎 지날 때마다
고통스러운 향기가 후욱 끼쳐왔습니다.
꽃잎이 다 누운 뒤 남은 암술에는
노란 꽃가루들이 곡옥처럼 반짝였습니다.
꽃가루 음절들이 만든 문장을
저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해독되지 않는 침묵이
장미를 장미로 만드는 원천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장미 한 송이를 걷고 난 뒤에도
걷지 않은 길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
열에 들뜬 손가락은
유리조각처럼 흩어진 꽃잎을 만지며
장미의 또 다른 입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들어간 적 없는 향기로운 방,
그러나 표정을 잃어버린 장미는
어떤 문도 불빛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꽃잎에서 저 꽃잎으로,
이 꽃잎에서 또 다른 꽃잎으로,
베인 손가락은 피를 흘리며 서성거릴 뿐이었습니다.
장미가 남은 향기를 다 토해낼 때까지
—《시와 시》 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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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등.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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