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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루저(Loser) / 최금진

오선민 2011. 8. 5. 14:15

루저(Loser)

 

   최금진

 

 

 

일류는 아니고 이류는 된다고 믿어봤자 지방대학을 나왔고

위대한 업적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고 큰소리쳐 봤자

어차피 위대할 수 없다, 그건 출세한 가문의 자제들 몫

소주를 먹고 취해 원룸으로 돌아가는 길

왜 취했는지,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는 호적등본에 안 나온다

백짓장도 맞들면 인건비만 나가니까 결혼은 못하고

연속극을 보다가 여주인공이나 생각하며 잠든다

아침마다 변비를 앓으며 읽는 신문은 언제나 남의 일

돈 많고 잘 생긴 사람들은 양복을 입고, 고급 승용차를 몰고

신문 톱기사에 등장하여 함부로 꿈꾸지 말라고 훈계한다

출근길과 퇴근길엔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걷는 건 경범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도둑고양이 같은 사내들이 고시원마다 그득하게 박혀

안 보이는 바깥 유리창에 뭐라고 낙서를 할 때

누구나 그 얼굴을 향해 돌을 실컷 던져도 좋다, 여긴 민주국가고

적어도 실컷 두들겨 맞을 자유쯤은 있지 않겠습니까

상류층은 아니지만 중산층은 된다고 믿어봤자

이 바닥에서 한걸음에 뛰어올라가야 할

지하도의 계단은 저렇게 많고

아침이면 또 지각을 할 것이다

매번 늦도록 시계가 잘못 맞추어진 게 아니라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지하철은 달리는데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싶다, 흠씬 두들겨 맞았으면 좋겠다

스테이크 다진 고기처럼 바닥에 눌어붙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서 목이 터져라 찬송을 부른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믿어봤자 다, 다, 소용없다

 

 

 

                            —《시안》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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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1년 제1회〈창비신인시인상〉 당선. 시집 『새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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