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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종이남자 / 이향란

오선민 2011. 7. 30. 16:54

종이남자

 

   이향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무색 무미의 종이남자를 접는다

 

세상을 향해, 어느 여자를 향해 허우적이던 팔과

무던히 뛰고 달리던 다리와

펄떡이는 뜨거운 심장 들키지 않게

종이비행기가 아니어도

던지면 어딘가 가볍게 톡 떨어질 수 있도록

내뱉지 못하던 말과 울음이 마음껏 새어나오도록

구겨진 생, 지나던 바람마저 들여다볼 수 있도록

 

활활 불지를 생각은 없다

주름살처럼 쪼글쪼글해진 그 남자 잘 펴서

애잔함 몇 자 적어 물 위에 가만히 띄워보고

고뇌로 가득 찬 얼굴 가려지도록

모자도 접어 씌워주고 싶다

 

우연히, 잠시 만나

아무도 모르게 꼬깃꼬깃 손안에 감췄다가 하늘로 날려 보냈다가

외로울 땐 천천히 다시 펴보던 종이남자를

고서(古書)의 중간 페이지 즈음에 슬며시 끼워두고 싶다

 

 

 

                                 —웹진《시인광장》201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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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란 / 1962년 강원도 양양 출생.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시집『안개詩』(2002)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안개詩』『슬픔의 속도』『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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