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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이가림, 「순간의 거울 2」감상 / 고규홍

오선민 2011. 10. 24. 18:08

이가림, 「순간의 거울 2」감상 / 고규홍

 

순간의 거울 2

              —가을 강

                                           이가림 (1943~)

가랑잎 하나가

화엄사 한 채를 싣고

먼 가람으로 떠난 뒤 

 

서늘한

기러기 울음

후두둑 떨어져

물거울 위를

점자(點字)인 양 구른다 

 

노을 타는

단풍밭

보랏빛 이내에 묻히고

 

깊은 하늘의 이마에 걸린

가버린 누이의 눈썹

그 그늘에 이슬들

아롱아롱 맺힌다

 

가랑잎 하나가

가을의 끝

한줌 허무를 싣고

먼 어둠으로 떠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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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하던 잎을 죄다 떨구었는데, 생의 미련을 채 버리지 못한 한 장의 가랑잎이 백목련 가지 끝에 남아 파르르 떤다. 가을 가뭄에 목이 마른 가랑잎도 바짝 말라 붉게 상기됐다. 한해 노동의 짐을 채 덜어내지 못하고 매달린 가랑잎에 가을의 끝이 살랑인다. 한없이 가벼워진 한 잎에 지리산 깊은 골 화엄사만큼 깊은 표정과 무게가 담겼다. 세상의 모든 저녁 풍경을 닮아 숱하게 많은 곡절을 간직한 한 잎의 속내다. 기러기 울음 몰고 온 바람 차고, 붉게 물든 갈잎들 우우 낙엽 하는 가을 숲이 보랏빛으로 물든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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