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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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귓가에 詩 울림_ 송진권의 「추석 만월」/ 박성우

오선민 2011. 9. 19. 12:06

귓가에 詩 울림_ 송진권의 「추석 만월」/ 박성우

 

추석 만월

 

                                                  송진권

 

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거나 한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디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물 들어오는 것 같은 것이다

흐느끼며 큰절이나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홀아비 살림살이만 같아

방바닥에 소주병만 구르고 퀴퀴하구나

만월이여

그 딸내미같이 세간을

한번 쓰윽 닦아다오

부엌에서 눈물 찍으며 조기를 굽고

저녁상을 볼 그 딸내미같이

 

― 송진권 『자라는 돌』(창비시선 331)

 

 

부산 구포역 근처에서였어요. 시락국집을 찾아 헤맸지요. 골목을 몇바퀴나 돌았을까요. 꽤나 맛이 좋다는 그 시락국집은 끝내 나오지 않았어요. "한 번만 더 돌아볼까요?" 바깥 골목까지 가보았지만 허사였어요. 아침이고 하니 대충 한 끼 때우면 될 걸 가지고 괜히 시락국이 먹고 싶단 말을 꺼낸 게 아닌가 싶었지요. 이른 아침부터 동행해준 그분께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어요. 안되겠다 싶어 아무 집이나 가자 했지요. 한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시락국 파는 집을 발견했어요. 물론 그렇게 찾던 ‘정품’ 집은 아니었지요. 다른 메뉴들 틈에 시락국이 끼어 있는 국밥집이었어요. 작고 허름한 가게였지요. 오전 기차표를 끊어놓은 상태라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어요. 사내들 냄새와 음식 냄새가 담배 연기와 섞여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죠. 사내들 냄새? 아침이었지만 사내 셋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한데 모여 기분 좋게 취해 있었어요. 소주와 맥주를 얼마나 깠는지 옆 테이블과 의자 주변까지 빈 병이 빼곡하더군요. 들어가긴 들어갔지만 빈자리에 앉기도 그렇다고 그냥 돌아서기도 애매한 상황이었죠. 퀴퀴한 냄새만큼이나 어둑한 실내에는 불도 켜 있지 않았어요. 어찌된 일인지 주인아줌마도 보이지 않았지요. “주인아줌마 안 계세요? 시락국 먹으러 왔는데요.”

사내들은 술 마시던 일을 잠시 멈추더니, 부랴부랴 실내등을 켜고 물을 내왔어요. 가스 켜는 소리와 냉장고 여닫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김치 한 종지와 시락국 두 그릇을 내주더군요. “밥은 안 주나요?”

냉면그릇 서운치 않게 퍼 나오는 한 그릇의 밥. 둘이 알아서 먹을 만큼 떠먹으라는 시늉을 하더군요. 어이가 없긴 했지만 화가 난다기보단 그 상황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무뚝뚝한 얼굴에 어린 미안한 표정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죠. 나름 귀엽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여튼 해장술에 취한 사내들이 내오는 밥상을 받는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죠.

사내들은 손님인 우리가 시락국을 한술 뜨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테이블로 몰려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해장 담배도 빼놓지 않고 충실히 피워대더군요. ‘한량 교본’ 책자를 백번쯤 정독한 사람들처럼 한량 본연의 일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지요.

시락국을 거의 비워낼 무렵, 삐그덕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지매 한 분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더군요. 그러자마자 술을 마시던 사내들이 일동 기립을 했어요. 어찌나 절도가 있던지, 하마터면 저도 숟가락 놓고 일어설 뻔 했다니까요. 빵긋빵긋 거수경례를 올리는 사내 둘은 그 아지매를 ‘행수님’이라 불렀고,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려 인사하던 다른 한 사내는 ‘여보야’라고 불렀어요. 아지매는 다름 아닌 그 시락국집의 안주인이었죠. 안주인이 주방 쪽으로 들어서자 사내들은 일동 기립을 할 때처럼 매우 절도 있게 일동 착석을 하더군요. ‘안주인은 지청구를 몇양동이나 퍼부을까?’

안주인은 짜증도, 화도 내지 않았어요. 술을 퍼대는 와중에 손님을 받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흡족해하는 표정이었죠. 그 사내들 또한 신성한 한량의 역할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짬을 내어 손님상을 차려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 어깨 가득 실려 있었죠. 사내들은 아까처럼 한량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어요.

시락국 든든히 먹고 가게 문을 나서는데, ‘여보야’를 외치던 사내가 문을 대신 열어주더군요.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던 그 사내의 인사성은 또 어찌나 밝던지요. 콧잔등에 흙이 묻어날 지경이었으니까요. 수행 중에도 무릇 꾀부리지 말고 예를 갖춰야 한다는 ‘한량 규범’을 곧이곧대로 지키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한량을 하려면 저 정도는 해줘야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저는 그렇게 송진권 시인의「추석 만월」에 나오는 ‘외동딸’과 ‘사위’를 부산 구포역 근처 식당에서 만났습지요.

송진권 시인의 첫 시집 『자라는 돌』에는 말맛을 마침맞게 살린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들이 참 많이도 들어 있습니다. 구질구질하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애잔하기도 한 얘기들 말이지요. 그에게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을 것 같은 얘기들을 꺼내서 조근조근 들려줄 줄 아는 남다른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러, “구쿰한” 냄새를 우리에게 풍겨주는지도 모르지요.

 

순두부 빛 살구꽃 덩을덩을 엉긴 마당

돼지기름 미끈한 고깃집에 앉아

구쿰한 비지장을 먹는다

도야지 비계와 신김치가 들어간 비지장을

한 숟갈 퍼넣고 썩썩 비비면

간수 먹은 하늘에 뿌옇게 엉기는 별

장판이 타들어가게 불을 지핀 아랫목

비지장 띄우는 내

곱은 손을 호호 불어주던 사람도 가고

송아지에게 덕석을 입혀주던 이들도 갔지만

아직 무르던 발굽은 잊지 못한다

그 퀴퀴하다고만 할 수 없는

구쿰한 비지장 띄우는 냄새를

손님이야 있건 말건 꾸벅꾸벅 조는 사내를

뚱뚱한 여자는 쉰 목소리로 타박하다

개숫물을 행길에 함부로 뿌린다

비로소

고향이다

 

― 송진권 「비지장 먹는 저녁―못골 18」 전문

 

 

여기에도 「추석 만월」의 ‘외동딸’이나 ‘사위’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장삼이사가 있군요. 그 외동딸과 사위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요. “구쿰한 비지장” 냄새가 나고 “개숫물을 행길에 함부로 뿌려”도 좋을 고향. 「조맹선이 소 몰 듯이」 살아도 별 흠이 되지 않는 고향으로 말입니다.

 

이으으으응 모르겄네

머리맡에서 할머니 갸웃대며 골똘하시다

그걸 어디다 둔다고 잘 뒀는디

이으으응 못 찾겄네 못 찾겄어

할머니 밤새 장롱이며 반닫이를 쑤석거린다

할머니가 이으으응 모르겄네 할 때

그 둥글게 꿈속까지 번지던 이으으으응은

글자로 옮겨 적을 수가 없다

(으가 세 번 들어갔는지 더 길게 발음이 되었는지)

할머니 밤마다 내 머리맡에서 고개를 갸웃대며

이으으으응 못 찾겄네

정신머리가 이렇게 없어서야 하시며

머리를 흔드신다

이으으응을 뒤적이며

자꾸 할머니를 빼닮았다는 나도

고개를 갸웃대며

문자로 옮길 수 없는 말과

어디 있는지 모를 무엇을 찾아

이으으으으으으응

이으으으으으으응

못 찾겄네 못 찾겄어를 중얼거려보는 것이다

― 송진권 「이으으으응」 전문

 

 

“이으으으응” 벌써 추석이군요. “이으으으으으으응” 아직 장맛비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죠. 그렇지만 하루하루 공기도 다르고 하늘빛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 창을 열고 하늘 한번 보세요. “아아, 가을 맞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올 겁니다. “이으으으응” 고향 가시는 길에 뻥튀기 아줌마 아저씨 한 번 정도씩만 만나시고 막힐 일 없이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그럼, 명절 잘 쇠시고요! (2011/09/05)

 

—〔창비문학블로그 창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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