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이가림, 「순간의 거울 2」감상 / 고규홍 본문
이가림, 「순간의 거울 2」감상 / 고규홍
순간의 거울 2
—가을 강
이가림 (1943~)
가랑잎 하나가
화엄사 한 채를 싣고
먼 가람으로 떠난 뒤
서늘한
기러기 울음
후두둑 떨어져
물거울 위를
점자(點字)인 양 구른다
노을 타는
단풍밭
보랏빛 이내에 묻히고
깊은 하늘의 이마에 걸린
가버린 누이의 눈썹
그 그늘에 이슬들
아롱아롱 맺힌다
가랑잎 하나가
가을의 끝
한줌 허무를 싣고
먼 어둠으로 떠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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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하던 잎을 죄다 떨구었는데, 생의 미련을 채 버리지 못한 한 장의 가랑잎이 백목련 가지 끝에 남아 파르르 떤다. 가을 가뭄에 목이 마른 가랑잎도 바짝 말라 붉게 상기됐다. 한해 노동의 짐을 채 덜어내지 못하고 매달린 가랑잎에 가을의 끝이 살랑인다. 한없이 가벼워진 한 잎에 지리산 깊은 골 화엄사만큼 깊은 표정과 무게가 담겼다. 세상의 모든 저녁 풍경을 닮아 숱하게 많은 곡절을 간직한 한 잎의 속내다. 기러기 울음 몰고 온 바람 차고, 붉게 물든 갈잎들 우우 낙엽 하는 가을 숲이 보랏빛으로 물든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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