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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가흠의 문인보| 소설가 박범신

오선민 2015. 4. 10. 10:11

  백가흠의 문인보| 소설가 박범신

 

                   글 백가흠(소설가),  사진 백다흠(은행나무 편집자)

 

 

 

ㆍ그저 우리는 소설로 맞짱 뜨는 사이야

그는 내 스승님이시다. 그는 사진을 찍은 다흠이의 스승님이시기도 하다. 대학 들어가던 해에 처음 만났으니 뵌 지 햇수로 20년이 넘었다. 가족과 친구 조 대리를 빼고 이렇게 오랫동안 꾸준하게 연을 이은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다. 이제는 대학 동창도 만나는 이가 없고, 선배나 친구도 문학한답시고 다 잃어버렸다. 스물에서 마흔이 될 때까지 꾸준히 문학으로 밥 먹고 술 마시고 소설로 연애하고 울고 화내고 삐치고 잘못을 빌고 용서를 하고, 간혹 여행을 같이한 사람이 선생님 한 분밖에 없다. 쓸쓸한 일인가, 아닌가. 뭐, 상관없이 그 이십 년간의 그를 떠올려보니 마음이 축축하게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쓸 말이 없는 것도,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달여 아무것도 쓰지 못해 끙끙댔다.

뭔가를 쓰려 한 그때부터 마음은 울기 시작했다. 감정과 기억이라는 것은 온전하지 못하여 자꾸 어떤 한곳으로만 향하곤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것처럼 내 스승도 마음속에서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마음이 쓰리고 시리었다.

어제 초저녁에 잠깐 잠들었을 적엔 꿈에 소설 쓰는 여자 선배 둘이 나왔다. 우리 셋은 어떤 시장 같은 곳을 헤매다 각자 택시를 타고 헤어졌는데, 선생을 만난 후였든가, 만나러 가는 길이었든가 그랬다. 그녀들은 잘 지내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선생과의 기억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의 기억을 불러오곤 한다.

 


글을 쓰고 있는 이렇게 이른 아침은 내게 드물다. 꿈 때문인지 홍은동에 살 무렵, 한 새벽이 떠올랐다. 나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헤매다가 그저 그런 소설 하나를 마감하고 상실감과 절망감에 터덜터덜 아무렇게나 걷고 있었다. 진이 다 빠진 몸은 자주 가곤 하던 어느 설렁탕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감 후엔 뭐라도 좀 먹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일곤 했다. 막 설렁탕집 앞에 들어서려는데 익숙한 차가 한 대 서더니 선생이 내렸다. “새벽부터 여기서 뭐하냐?” 그는 물었고, 나는 상황이 현실적이지 않아서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너도 소설 썼구나? 같이 아침 먹자.” 몰골이 그랬나, 쥐어뜯은 머리를 들켰나, 그는 내 상황을 훤히 본 사람 같았다. 선생도 밤새 소설을 쓰고 학교로 향하던 중이라고 했다. 밤새 쓴 원고를 프린트해서 퇴고를 보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수업해야 할 학생들 소설이 연구실에 있어 읽으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별말 없이 선생과 나는 설렁탕을 빠르게 비웠다. “나만 글 쓰며 날을 새운 게 아니어서 위안이 된다. 야, 어서 가서 좀 자라.” 선생은 학교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홍제천을 조금 더 걸었다.

선생을 만난 다른 새벽, 네팔의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한 마을에서였다. 같이 산에 올랐으나 우리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 보름째 함께 산행을 하던 중 한 마을에서 선생이 사라졌다. 일행은 산에 온 지 보름이었지만 이미 선생은 에베레스트를 석 달째 걷던 중이었다. 선생은 표정과 눈빛도 뭔가 좀 달랐는데 내가 한국에서 알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주 먼 곳을 바라보거나 전속력을 다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산길을 올랐다. “선생님 발에도 당나귀처럼 굽이 달렸나 봐요.” 꽁무니를 쫓아다니기도 버거운 내가 볼멘소리를 뱉었다. 선생은 어디에 홀린 듯, 먼 허공과 허무를 걷고 있는 듯 그의 눈빛이 낯설기만 했다.

그가 우리를 버리고 길을 떠나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선생이 사라졌다는 것을 밤이 되어서야 일행은 알아차렸다. 얼마나 멀어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길은 하나뿐이라,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산을 내려가려고 혼자 길을 떠난 것은 아닐 것이었다.


 

마을을 벗어나 삼십 분쯤 걸었을까. 좁은 산길 한가운데 편지가 놓여 있었다. 비에 젖을까 비닐로 싸고, 날아갈까 돌로 눌러놓은 편지 몇 장이 놓여 있었다. 그가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편지를 쓰는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문학은 혼자 가는 거야. 동반자도 없고 앞서 걷는 사람도 없어. 고독의 길을 그저 멈추지 않고 걷는 거지. 이렇게 걷고 헤매다가 갈팡질팡하다가 죽는 거야.” 그가 수업 시간이면 젖은 눈으로 말하던 모습이 길 가운데 놓여 있었다. 겁이 났는데 편지에 적은 글이 꼭 어떤 마지막 말처럼 비장하게 읽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인한 사람이지만 한없이 여린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웠다. 내게 적은 말은 추신 하나뿐이었는데 사모님에게 전해달라는 몇 마디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도저히 전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반나절 거리 떨어진 마을에서 우린 조우했다. 선생은 일행을 보자마자 미안해서 눈물을 글썽였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묻지 말아야 할 말이었지만 내 경솔함은 항상 생각보다 앞선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선생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선생은 적막하고 깜깜하고 고독한 또 다른 산길을 걷고 있었다. 동행도 없고 동반도 없고, 앞서는 이도 없는 길. 굽은 등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얀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고 뒷짐을 지고 묵묵하게 어떤 산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좇았다.

그는 타고난 선생이다. 강의는 언제나 감동적이었다. 문학처럼 모호하고 애매한 학문이 있을까만 그는 성격 때문인지 그런 법이 없었다. 문학에 대한 질문에는 항상 답이 있고 확신이 있었다. “문학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고, 선생과 제자로 만났지만 그저 문학으로 대화하고 노는 것이야. 우리는 서로 소설로 맞장 뜨는 사이야, 그저. 소설 동료이고 친구고 질투하는 연적인 거지. 그러니 소설은 니들이 알아서 써라. 핥핥핥.” 그는 권위 없는 선생이었다. 소설 선생은 소설을 쓰는 것으로 모든 권위가 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학수업은 강의실보다 술자리에서가 더 좋았으며, 밤새 싸우고 화해하는 우리를 그저 놔두고 바라보는 배려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겨우 깨닫는 나이가 나는 되었다.

요즘 같은 때, 꽃잎이 바람에 날려 눈처럼 내리면 그는 이토록 환하고 눈부신 햇살을 참을 수 없어 줄곧 눈물을 보이곤 했던가. 오래전 이맘때, 같이 삼천포에 간 적이 있다. 섬진강을 따라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람을 맞으며 흩날리는 꽃잎을 향해 외쳤다. “진짜, 행복하고, ×같이 아름답다.”

▲ 박범신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단편 소설을 주로 썼으며 1979년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를 발표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왕성하게 집필하다 1993년 돌연 절필을 선언, 이후 3년여의 침묵 끝에 중편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장편소설 <더러운 책상> <은교> <비즈니스> <소금>, 소설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흰 소가 끄는 수레>, 산문집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비우니 향기롭다> 등을 발표했다.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직을 정년 퇴임한 뒤 논산과 서울을 오가며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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