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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감상

[스크랩] 복면을 쓰고 / 김이듬

오선민 2015. 9. 3. 16:05

복면을 쓰고

 

     김이듬

 

 

 

 

  사과를 깎다가 텔레비전 켠다
  심심한 일요일 밤에

  음악 버라이어티쇼 복면가왕이란다
  희한한 가면 쓰고 등장한 가수가 노래한다

  누굴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첫 토막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저 사람
  사과 반쪽을 건네고 싶네
  나머지 반도 나누고 싶다네

  소백산 자락에서 수확했다는 이 붉고 새콤달콤할 사과 몇 알
  훔쳐온 사람처럼 어서 없애고 싶네

  스타킹을 벗겼을 때 홍안이었다네
  편의점 앞에서 그 청년과 마주쳤던가
  언젠가 어디쯤서 당신과 나 스치지 않았을까
  태연히 토막살인 현장검증 마친 살인자의 모자 밑으로 보이던 입매
  나는 한입 가득 사과를 깨물고
  싼 게 왜 싼지 이유를 알게 되고

  세상이 다 아는 일
  숨기는 게 없다고 속삭이는 복면을 쓰고
  진심으로 사랑해 아양 떠는 숙녀의 스타킹을 둘러쓰고
  나도 속아 넘어가는 내 비장의 마스크가 있다는 거
  자꾸 쓰다 보면 살결로 내장으로 스민다는 거
  마스크 쓰고 시위 현장에 가면 처벌 대상이 된다는 거

  세상이 다 아는 노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방청객은 눈물을 흘린다

  물에 안 지워지는 화장품이 얼마나 많은지
  석고 팩은 부담스럽다는 거
  얇고 부드러운 피부복면일수록 속이 덜 비친다는 거
  세상이 다 아는 거
  홍옥 껍데기 깎는 것처럼 일도 아닌 일

  다 아는 걸 쓰고 있는 내 피부 아래 흰 장갑이여 앙상한 손가락이여
  내 안에서 자꾸 최초인 것처럼 떨며 흔들리는 은사시나무여 아니
  노래 가사처럼 가시나무 가지인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편한 곳 없어서
  내 바깥으로 튀어나간
  당신인가 나인가 안팎이 없는
  어쨌든 결과 색이 나쁘지 않은 복면을 쓰고

 

 

 

                       —《유심》201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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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2001년 《포에지》를 통해 시 등단. 시집『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달렘의 노래』『히스테리아』,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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