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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의 「어린 왕자」감상 / 서대선 본문

시 비평

강인한의 「어린 왕자」감상 / 서대선

오선민 2011. 6. 21. 21:52

어린 왕자

 

   강인한

 

 

내 어린 날의 몽당 크레용을 주세요.

까실까실한 흰 빛 도화지에 나를 그리고 싶어요.

밤 검은 산에서 혼자 돌아오던

아홉 살의 보랏빛 산길을

비 갠 날 거미줄에 걸리어 잉잉거리던

방울 무지개와

연잎에 돌돌거리는 누나 고운 눈빛이랑

등나무 아래로 등나무 아래로 어룽지던 연둣빛

일요일의 심심한 하모니카 소리도 그리고 싶어요.

내 어린 날의 색종이를 주세요.

불쌍한 네로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의

그 붉은 풍차를 오려 붙이겠어요.

바람 부는 날 팔랑거리는 옥색 대님도

내 손바닥을 간질이던 눈 까만 강아지 이름도

인젠 다아 기억할 수가 있어요.

소아과 병원에 끌려 들어가면

싸아하니 밀려오는 하이얀 병원 냄새

뺨 비빌 때 콕콕 찌르던 아버지의 턱수염도

안 잊혀요, 영영 안 잊혀요.

내 어린 날의 몽당연필을 주세요.

나는 적고 싶어요.

양지바른 골목길을 졸랑졸랑 달려오는

기쁜 발소리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이는 사 이삼은 육

등에 멘 책가방 속에서

잠자리표 연필이 꽃구슬과 만나는 소리

곱셈과 나눗셈이 밤늦도록 소곤거리는 소리를.

내 어린 날의 좋은 기억을 주세요.

그 어려운 병이래도 좋아요, 아주 다 주세요.

 

 

                       — 시집 『불꽃』(1974년, 대흥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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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에 상영 된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La Citĕ des enfants perdus : 장 피에르 주네 감독, 마르크카로 감독)에는 외로운 어떤 과학자가 만들어 낸 기계 인간 크랭크가 태어날 때부터 꿈을 갖지 못해 순식간에 늙어 버리게 되지요. 그러자 젊음을 되찾으려 아이들을 유괴해서 아이들의 꿈을 훔치는 장면이 나온답니다. 꿈을 꿀 수없는 기계인간들의 세상은 암울한 배경 속에서 바람 속에 쓰기들만 굴러다니며, 마치 샴쌍둥이처럼 복제된 행동만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장면들이 펼쳐지는데, 그 속에서 인간인 작살잡이 원과 소녀 미에뜨의 대화 속에 희망의 전언을 찾아볼 수 있었답니다.

 

   “원은 차력사 하기 전에 뭘 했어?” “원은 어부였어, 고래를 잡는.” “고래? 근데 왜 그만 두었어?” “원은 언제나 고래를 잡았어. 날이면 날마다 작살을 던져서 고래를 잡았지.” “응….” “그런데 어느 날 원은 고래의 노랫소리를 들었어.” “노랫소리?” “그래, 노랫소리, 그날부터 원이 던지는 작살은 언제나 빗나갔지”

 

   “비 갠 날 거미줄에 걸리어 잉잉 거리던/ 방울 무지개와/ 연잎에 돌돌거리는 누나 고운 눈빛이랑/ 등나무 아래로 등나무 아래로 어룽지던 연둣빛“을 초롱초롱한 두 눈 속에 담아내던 어린 날, “등에 멘 책가방 속에서/ 잠자리표 연필이 꽃구슬과 만나는 소리/ 곱셈과 나눗셈이 밤 늦도록 소곤거리는 소리를” 그 흠 없는 순수의 세계를 기억의 수첩에 그려두고 어른이 되어서도 꿈속에서 불러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아무리 팍팍하고 고단해도 “꿈을 갖지 못한 기계 인간 크랭크처럼 순식간에 늙어 버리게“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가끔은 유년의 “몽당 크레용”을 꺼내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기억을 그려보면 어떨까요?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신구대학교수 dsso@shin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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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메모

 

 

   내 초등학교 시절은 광주 무등산 아래 서석초등학교에서 보낸 4년간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2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그 기간. 우리 집(사세청 관사)이 있는 서석동에서 동방극장(지금의 무등극장)까지 가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에는 맛있는 만두집도 있었고, 들어가는 게 무섭고 싫었던 김녹호 소아과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동성당으로 빠지는 샛골목도 있었고….

   이 시는 그 유년시절의 앨범인 셈입니다. 창작노트를 찾아보니 1970년 1월 31일에 탈고했고 1973년 《풀과 별》2월호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등단한 뒤 7년 만에 낸 시집 『불꽃』에 수록, 그 후 시선집 『어린 신에게』(1998년, 문학동네)에 재수록한 시입니다. 시집 『불꽃』의 후기를 보면 내가 그 간에 쓴 3백 편 가운데 101 편을 실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시의 제목으로 차용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학교가 파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 어쩌다가 달음박질이라도 치면 등에 멘 란도셀(책가방) 속에서 필통이 유난스레 딸각거렸지요. 잠자리표(돔보) 연필이랑 초록빛 투명한 유리구슬들이 필통 속의 한 식구들이었습니다. 그 소리가 참 맑았습니다.  마흔여덟 젊은 나이로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5학년 봄, 내 유년시절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_ 강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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