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나해철 본문

시 비평

[스크랩]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나해철

오선민 2016. 6. 7. 08:44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나해철


잊고 살기로 하면야

까맣게 잊을 수도 있는데

불현듯 가슴에 불쑥 나타나

화들짝 놀라게 하는 건

아프게 하는 건

날보고

그래 짐승처럼 살지 말고

사람으로 살라는 걸거야

가끔은 생각하며 살아야지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했던 일들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듯

한동안만이라도 고요히 어루만져야지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내일도 오늘같이 살 수는 있는데

 

- 시집 『긴 사랑』(문학과지성사, 1992)

...............................................


 사람을 흔히 망각의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사람만큼이나 지난 일을 못 잊어하고 진저리치거나 그리워하는 동물도 없을 것이다. 엊그제까지 죽고 못 사는 사이처럼 지내다가도 어느 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린다든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대 없이는 못 살아했던 부부가 사별 후 신속한 망각의 힘으로 다른 이성과의 결합을 성사시키는 걸 보면 사람으로 어찌 그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만큼 지난 일을 생각하고 기억해내면서 아파하거나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는 지적 생명체도 없는 것이다.


 ‘잊고 살기로 하면야 까맣게 잊을 수도 있는데’ ‘불현듯 가슴에 불쑥 나타나 화들짝 놀라게 하는 건 아프게 하는 건지난 일들이 뼛속 골골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쉬 잊지 못하는 능력과 잊히어지는 능력을 동시에 갖고 있다. 문제는 잊어 버려야 할 것은 안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리는데 있다. 지난날을 잊지 못해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 꼼짝달싹 못할 경우엔 과거를 잊고 털어버리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이나 실패일지라도 그걸 반면교사로 삼아 현재와 미래를 살릴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오래 전 최선을 다해 목청껏 불렀던 박두진 작사 ‘6.25의 노래. 노래는 강도를 더해 3절까지 이어지며 매절마다 붙는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장엄하고 우렁찬 후렴으로 마무리된다. 매년 6월 불렀던 노래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사라졌다가 이명박 정부이후 부활한 노래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가장 아픈 상처인 6.25를 잊지 말아야 함은 당연한 노릇이지만 이 섬뜩하고 극단적인 복수와 대결구도의 가사 내용이 지금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지는 생각해 볼일이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호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며 추모하는 날이다. 5.18을 포함해 이 나라 모든 역사의 아픔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의 영령을 추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현충일이 66일인 이유는 24절기 중 망종 때 조상에게 제사 지내던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아이들은 5.188.15와 헷갈려하고 6.25를 조선시대 임진왜란쯤의 먼 역사처럼 이해하는 요즘이다.


 ‘잊고 살기로 하면야’ ‘내일도 오늘같이 살 수는 있는데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사랑과 그리움뿐 아니라 폭력과 상처와 아픔까지도, 그것을 통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듣고 그 해답을 모색해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사랑과 그리움을 감싸 안듯이 잊고 싶은 상처와 아픔의 기억도 보듬을 수 있는 것이다. 공지영은 고통받는 이를 가벼이 여기던 나날이여 저주받으라라면서남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실은 자기 자신에게도 무관심하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밤, 실은 자신의 영혼에게도 조소를 퍼붓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오늘 밤은 모든 슬픈 이들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포개자



권순진


Forest Reverie - Hennie Bekker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