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스크랩] 미필적 고의/ 윤지영 본문
미필적 고의/ 윤지영
그가 서 있다
그와 그가 서 있고, 그와 그 사이 그녀가 서 있다
한시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눈이 있고, 그 눈과 눈 사이에 형형한 눈이 있고
초조가 서 있다. 초조와 불안이 나란히 서 있고,
초조와 불안 사이에 또 다른 초조가 시계를 보며 서 있다.
초조와 불안, 또는 초조와 초조 사이, 한 가닥 긴장이 슬그머니 기어들어
시린 듯 눈을 감는다. 그녀만 남고
일제히 사라진다.
- 시집 『물고기의 방』 (황금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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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란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어떤 범죄나 안 좋은 결과가 발생될 가능성을 미리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한 행위를 의미한다. ‘과실’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그 구분이 쉽지 않을 경우가 있다. 사람의 통행이 잦은 골목에서 엽총으로 새를 잡는다며 총질을 해대다가 사람을 죽게 했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가 성립되지만, 허가된 사냥구역에서 노루라고 판단하고 발포했는데 예기치 않게 사람이 맞아 죽었다면 과실치사죄가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한겨울밤 역 구내에서 쪼그리고 자는 노숙자를 깨워 공익요원이 역 밖으로 강제로 쫓아내는 바람에 추위에 얼어 죽었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몇 년 전 쌍용차 사태 당시 23명의 해직자와 가족이 사망했다. 그때 더 이상의 방치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란 주장까지 나왔었다. 이런 경우들은 어느 특정인에게 법적인 살인죄를 물을 성질의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자기네들 사정이라며 계속 나 몰라라 외면하는 것은 지극히 비인간적 처사임이 분명하다.
‘미필적 고의’를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는 우려되는 상황을 인식하고 용인했느냐 하는 점이다. 어린이보호구역인 좁은 골목길에서 급히 차를 몰고 가는 운전자가 있다. 아이들이 혹시 차에 치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의 운전기술을 믿고 달리다가 아이를 다치게 한 경우 일단 고의성 없는 ‘인식 있는 과실’에 해당하지만, 자기 갈 길이 급해 만약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미필적 고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달릴 때 ‘초조와 불안’이 떠나지 않는다. 애초에 갚을 의사도 능력도 없이 계획적으로 타인의 돈을 편취했다면 당연히 사기죄가 되겠는데, 형편이 안 좋아 갚지 못하는 상황을 예견하고서 갚지 못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기죄라 할 수 있겠다. 연애에서 ‘한시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눈이’ 있고, ‘초조와 불안 사이에 또 다른 초조가 시계를 보며’ ‘한 가닥 긴장’이 기어들었다면 그나마 양심적이라 하겠다.
사법부는 세월호 이준석 선장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혐의를 적용했다. 그 연장에서 이재명 시장은 ‘세월호 7시간’과 관련 대통령을 업무상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고발하면서 자신의 견해로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가 상당하다고 주장했다. 꾸물대며 통영함의 구조 지시를 막은 것, 참사 후 '대통령은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이상한 변명 등의 증거만 모아도 최소 직무유기, 업무상과실치사이고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7시간’뿐 아니라 그동안 밝혀진 사실들을 보면 불행과 파국을 예견할 수 있음에도 방치했거나 밀어붙인 결과 미필적 고의성 범죄행위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진사퇴 않고 기어이 ‘그녀만 남을’ 때까지 온 국민을 ‘초조와 불안 사이에’ 몰아넣은 것도 미필적 고의라 하겠다. 이제 그 긴장의 종착역까지 왔다.
권순진
Spiritual Energy - Quantic New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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