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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거시대, 혹은 미궁 / 김종호 본문

좋은 시 감상

혈거시대, 혹은 미궁 / 김종호

오선민 2017. 5. 4. 09:32

혈거시대, 혹은 미궁

 

김 종 호

 

열어 제친 양은솥에서

돼지머리가 불쑥, 올려다본다

김이 나는 눈을 감은 채, 본다

물방울 맺힌 천장을 거미줄이 잡고 있는 백열등 꼬리를

창자가 휘감은 뚱뚱한 머리로, 본다

웃음 띤 얼굴로, 자세히 보면 엄숙하게, 본다

 

저 미소가 우리에게 던지는 할()이 아닐까

그 옆 도마 위에 입을 조금 벌린 채

웃고 있는 또 하나의 돼지머리, 삶아져서

바뀌지 않는 표정으로 지나는 사람들, 끊임없이, 본다

저 돼지는 마지막 울음도 울지 않았나,

어디에도 울음의 흔적이 없다

목이 베이는 순간에 웃을 수 있다니!

 

말보다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동굴 같은

자유시장 순댓국집 골목

혀를 빼앗긴 앵무새 목소리로 악을 쓰듯

실패한 혁명을 이야기하는 한 무리 혈거족들 옆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우리는

두꺼운 육질의 혀와 귓바퀴를

두툼하게 썰어 담은 접시에 코를 박은 채

돼지처럼

생의 마지막은 웃으며 마무리하자고

거듭 술잔을 부딪쳐 뇌에 건성으로 새기며

혀 짧은 앵무새 목청으로

웅성거리는 소리들에 휩싸여

비틀거리는 동굴 속을

떠돌고 있을 뿐

 

 

김종호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강원문학상 수상

  ∙저서 : 『물바람빛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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