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혈거시대, 혹은 미궁 / 김종호 본문
혈거시대, 혹은 미궁
김 종 호
열어 제친 양은솥에서
돼지머리가 불쑥, 올려다본다
김이 나는 눈을 감은 채, 본다
물방울 맺힌 천장을 거미줄이 잡고 있는 백열등 꼬리를
창자가 휘감은 뚱뚱한 머리로, 본다
웃음 띤 얼굴로, 자세히 보면 엄숙하게, 본다
저 미소가 우리에게 던지는 할(喝)이 아닐까
그 옆 도마 위에 입을 조금 벌린 채
웃고 있는 또 하나의 돼지머리, 삶아져서
바뀌지 않는 표정으로 지나는 사람들, 끊임없이, 본다
저 돼지는 마지막 울음도 울지 않았나,
어디에도 울음의 흔적이 없다
목이 베이는 순간에 웃을 수 있다니!
말보다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동굴 같은
자유시장 순댓국집 골목
혀를 빼앗긴 앵무새 목소리로 악을 쓰듯
실패한 혁명을 이야기하는 한 무리 혈거족들 옆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우리는
두꺼운 육질의 혀와 귓바퀴를
두툼하게 썰어 담은 접시에 코를 박은 채
돼지처럼
생의 마지막은 웃으며 마무리하자고
거듭 술잔을 부딪쳐 뇌에 건성으로 새기며
혀 짧은 앵무새 목청으로
웅성거리는 소리들에 휩싸여
비틀거리는 동굴 속을
떠돌고 있을 뿐
◖김종호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강원문학상 수상
∙저서 : 『물․바람․빛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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