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좋은 시 감상 (532)
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접기로 한다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
아들아! / 이미경 아들아! 너 없는 이 곳에 꽃이 핀단다. 아들아! 너 떠난 이 곳에 바람이 분단다. 너를 잃고 주저앉은 내 가슴 속에는 어둠만이 가득한데 여전히 이 나라에는 해가 뜬단다. 여전히 나무가 자라고 숲이 우거지고 새들이 노래한단다. 햇살 가득한 바다에는 파도가 밀려오고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모래알이 반짝인단다. 네가 없었다면 이 나무와 숲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었을까. 네가 없었다면 저 바다와 갈매기는 누구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아들아! 나라가 있어 내가 너를 낳을 수 있었기에 네가 있어 이 나라를 지키고 어미를 지켰구나. 나라가 있어 네 이름을 가질 수 있었기에 네가 있어 이 나라의 이름을 지키고 이 민족을 지켰구나. 아들아! 살아있어서 네가 나의 기쁨이었다면 죽어서는 나라의 기쁨..
밟히는 풀이 있다 김종호 풀밭을 걸을 때마다 두렵고 죄스럽다 쓰러졌다 무겁게 일어서는 풀 끝끝내 일서서지 못하는 풀 키 큰 풀들은 키가 큰 대로 키 작은 풀들은 키가 작은대로 온몸을 눕혀 길을 내준다 그리움을 향해 솟아오르던 그들의 여윈 어깨가 속절없이 무너진다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그들은 가끔 풀빛 장검을 휘두르거나 도깨비바늘 같은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으로 사소한 반발을 시도할 때도 있지만 풀밭에 가면 언제나 밟히는 풀들이 있다 우두둑 힘없이 뼈를 눕히는 풀들이 있다 분노와 서글픔이 흐르고 흘러 발목을 적시는 풀밭에 가면 나는 스스로 서러워 쑥부쟁이, 물달개비, 노루오줌꽃 그들 곁에 말없이 앉았다 온다 눈물겨운 그들의 작은 씨앗 몇 알 내 힘없는 가슴에 품고 그들의 뿌리가 살아있음이 다행이라고 그..
속도 / 이원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인간들의 동화책에서만 나온다 만약 그들이 바다에서 경주를 한다면? 미안하지만 이마저 인간의 생각일 뿐 그들은 서로 마주친 적도 없다 비닐하우스 출신의 딸기를 먹으며생각한다 왜 백 미터 늦게 달리기는 없을까 만약 느티나무가 출전한다면 ..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 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고향(故鄕)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
라일락 고진하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들을 토해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 천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을 움켜주고 나와 천지..
길 김지하 걷기가 불편하다 가야하고 또 걸어야 하는 이 곳 미루어주고 싶다 다하지 못한 그리움과 끝내지 못한 슬픈 노래를 허나 길은 걸어야 하고 생각은 가야하나 보다 눈물이 흐른다 보내야 하고 잊어야 하는 이 곳 눈 있어 보지 못한 너와 입 있어 말 못하는 내가 허나 길은 걸어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