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좋은 시 감상 (532)
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손목 윤제림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 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엔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
철길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 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 오름을 적셔 주었다. 무너져 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어 뭇짐승의 왕이 된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종벽한 곳에 살기를 힘쓰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
꽃의 사적인 연애방식 하 린 앞집 누나가 교복을 찢고 도시로 날아간다 날아간 자리에 나팔꽃은 피지 않고 온종일 축축한 웃음이 비릿한 생각을 타고 올라간다 꽃의 심장이 태양 아래서 팔딱거리듯 목구멍에서 욕(慾)이 팔딱거린다 꽃의 맨살을 찢고 싶은 밤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아침마다 눈깔이 뒤..
살구나무 장롱 이경림 아버지, 살구씨 하나를 뜰에 심었는데 왜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장의 떡잎이 나오나요 그 속에 무슨 손이 녹두 같은 싹 터트려 허공으로, 허공으로 치솟게 하나요 햇살 속으로 이슬 속으로 소나기 속으로 막 달아나게 하나요 문득 비 그친 후 노란 김 피워 올리며 아기 살구 몇 매..
못 / 정호승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루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거짓말 / 문정희 가령 강남 어디쯤의 한 술집에서 옛 사랑을 다시 만나 사뭇 떨리는 음성으로 "그동안 너를 잊은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참말일까 그말이 곧 거짓임을 둘 다 알아차리지만 그 또한 사실은 아니어서 안개 속에 술잔을 부딪 칠 때 살아온 날들을 거짓말처럼 참말처럼 사라지고 ..
뉴 타운 / 이수익 정든 사람들은 떠났다. 집집이 외부 벽면의 붉은 페인트 글씨가 공가(空家)임을 알리고 사형수의 마지막 남은 며칠을 떠올리게 했다. 처처에 방들은 텅 비었다. 씨팔, 이왕 뜯길 집, 이주민의 손발이 거칠게 다룬 자취들이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파경(破鏡)이었다. 그들은 한 푼어치도..
사월에 걸려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