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좋은 시 감상 (532)
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제2회 질마재해오름문학상] 눈의 심장을 받았네 (외 2편) 길상호 당신은 새벽 첫눈을 뭉쳐 바닥에 내려놓았네 그것은 내가 굴리며 살아야 할 차가운 심장이었네 눈 뭉치에 기록된 어지러운 지문 때문에 바짝 얼어붙기도 했네 그럴 때마다 가만히 심장을 쥐어오던 당신의 손, 온기를 기억하는 눈의 심..
마차 (외 2편) 박형준 조선 국화가 성묘 끝난 무덤에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가족들이 서울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나는 신작로를 서성거렸다 첫서리가 내리던 날 신작로에 마차가 지나갔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지나갔다 그런 뒤 적막 속에서 서리 꺼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마부는 외투를 눈썹까지 끌..
귓밥 파기 강인한 나는 아내의 귓밥을 판다. 채광가(採鑛家)처럼 은근히 나는 아내의 귓구멍 속에서 도란거리는 첫사랑의 말씀을 캔다. 더 멀리로는 나에 대한 애정(愛情)이 파묻혀 있는 어여쁜 구멍 아내의 처녓적 소문을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나는 그것들을 불어버린다. 아, 한숨에 꺼져버리는 고운 ..
김이듬, 「서머타임」 발목은 시들어간다 걸음을 낭비했다 위세척을 하고 넌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여름이 제일 추워, 나는 없어질 거야 너는 눈물을 흘리며 웃지만 해가 뜰 때까지만 같이 있어줄게 풍선을 불어줄게 날아오르다가 터지겠지 꿀벌은 꽃잎 속에서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너..
[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맨드라미 맨드라미 김명인 붉은 벽에 손톱으로 긁어놓은 저 흔적의 주인공은 이미 부재의 늪으로 이사 갔겠다 진정 아프게 문질러댄 것은 살이었으므로 허공을 피워 문 맨드라미는 지금 생생하게 하루를 새기는 중! 찢긴 손톱으로 이별을 긁어대는 오늘의 사랑 뜨겁다 아침..
어두워서 좋은 지금 (외 2편) 박소유 처음 엄마라고 불렸을 때 뒤꿈치를 물린 것같이 섬뜩했다 말갛고 말랑한 것이 평생 나를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너무 뜨거워서 이리 들었다 저리 놓았다 어쩔 줄 모르다가 나도 모르게 들쳐 업었을 거다 아이는 잘도 자라고 세월은 속절없다 ..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에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 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에서 부산..
오래된 생불(生佛) (외 1편) 홍종화 어미개가 새끼를 열한 마리 낳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털은 까칠했다 어미개가 탯줄을 잘라 먹고 새끼 똥을 먹어 치웠다 황금 꽃똥을 먹었는데 시꺼먼 설사를 해댔다 어미개가 새끼를 핥아 주었다 양수를 머금었던 강아지들의 털이 녹차밭 같았다 어미개..
호랑이를 만난 토끼가 안도현 호랑이를 만난 토끼가 어흥, 하고 입을 크게 벌리면 얼마나 좋을까? 토끼 이빨이 쑥쑥 자라나겠지 토끼 꼬리는 쑥쑥 길어질 거야 그때 호랑이 귀가 길쭉해지고 호랑이 꼬리가 짤막해지고 호랑이 발톱이 말랑말랑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토끼는 토끼여서 호랑이를 해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