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 비평 (169)
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오후의 지퍼들/ 배옥주 지퍼를 열자 여자들이 쏟아진다 필러 맞은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수다들 루비똥이 쏟아지고 포르쉐가 쏟아지고 아이들이 쏟아지고 남편들이 쏟아지고 카푸치노 속으로 다시 빨려가 회오리치는 수다들의 향연 왼쪽으로 저었다가 오른쪽으로 저었다가 내연녀와 짜..
시월/ 황동규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
부엌의 불빛/ 이준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등유..
식량주의자/ 양문규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땅속에 낙원이 들어앉길 바라진 않았지만식량주의자였던 아버지 평생 농사꾼으로 산다 논과 밭과 한 몸으로 연민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아버지의 연대 쌀 보리 밀 콩 감자 고구마를 위하여 일흔, 하고도 네 해 동안 보급 길 걸어왔다 똥막대기..
젖/ 상희구 주스나 콜라처럼 마시는 것이 아니다 젖은 먹는 것이다 이 오래고도 유정한 食糧 언젠가 '아프리카 참상'이란 보도사진전에서 정강이뼈가 유독히 쾡한 눈의 덩치 큰 한 사내아이가 살갗이랄까 껍질이랄까 ㅡ아무튼 모든 살점이 육탈해버려서ㅡ 머리 위로 올라붙은 그야말로 ..
사랑으로 나는/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
1974/ 이시영 항구 남쪽에서도 귀신이 나왔다고 한다 해안통 쪽에서 나타나 시내 복판으로 들어가는 더벅머리 셋을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을 향하여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볼일이 있다고 재빨리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없다 광주(光州)에서도 대낮에 여우가 나왔다..
가까운 사람을 멀리 사랑하기 위하여 / 김승희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내가 온통 벌거숭이로 피를 칠하고 있을 때 난 알 것 같았어, 왜 별이 아름다운지를, 난 알아질 것 같았어, 만일 구름의 너울이 없다면 어떻게 감히 태양을 사랑-이라고 부르겠는가를, 밤에 마지막 외침처럼 황량한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