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좋은 시 감상 (532)
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도둑키스 황병승 카페 문을 열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들어섰다 탁탁 발을 구르며 마치 남자의 등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에스프레소 진하고 빠르게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를 스치듯 지나갔을 뿐 마치 말이 필요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외 2편 김충규 어두운 낯빛으로 바라보면 물의 빛도 어두워 보였다 물고기들이 연신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는 것은 어둠에 물들기를 거부하는 몸짓이 아닐까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에 취하지 않는 물고기들,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몰골은 어..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 강인한 뜨겁게 데워진 돌벽 위에 손을 내밀었다 담쟁이의 망설임이 허공에서 파문을 만들었다 파란 물살에 문득 누군가의 마음이 걸렸다 능소화였다 먼저 키를 늘이는 담쟁이를 보고 봄부터 여름까지의 거리를 능소화는 헤아려 보았다 담쟁이가 가녀린 허리를 가만히 내주었다..
옛날과 물푸레나무 황금찬 이제는 옛날, 그보다도 먼 내 어린시절 누리동 하늘 숲속에 외딴 초막이 내가 살던 옛집이다. 그 집 굴뚝머리에 몇십년이나, 아니 한 백년 자랐을까 큰 물푸레나무가 있었다. 바람이 불며, 비가 올 때면 나뭇잎 쓸리는 소리와 비 듣는 가락이 흡사 거문고 소리 같아서 우리는 ..
* 사진 : 김금자 시인 꽃잎· 1 김춘수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홍해리 선생님이 새 시집 ‘비밀’을 보내왔다. 현재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월간 우리詩, 우이시낭송회, 도서출판 움>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2년 전에도 몇 번째 시집인지도 모를 ‘황금 감옥’과 ‘비타민 詩’를 내었는데,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시집에는 전에도 쓴 일이 있는 ..
노을같이 바람같이 황송문 이제는 정말 마음 두지 않으리 뿌리 같은 거 꽃나무 뿌리 같은 거 깊이깊이 내려 뻗는 연민 같은 거 연민 같은 거 미련 같은 거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뒤척이다 헝클어지는 타래실 같은 거 이리저리 얽혀지는 인연 같은 거 인연 같은 거 보내놓고 돌아서다 되돌아보는 눈빛 같..
넥타이 (외 1편) 김기택 목이 힘껏 천장에 매달아놓은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공중에 들린 발바닥이 날개처럼 세차게 파닥거린다 목뼈가 으스러지도록 넥타이가 목을 껴안는다 목이 제 안에 깊숙이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넥타이에 괄약근이 생긴다 발버둥 치는 몸무게가 넥타이로 그네를 탄다 다리가 차..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이대흠 내가 없었을 때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오래도록 세상은 젓갈처럼 깊어가고 나는 아무런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고 한 나라를 이루지도 못했다 지네인듯 발이 많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고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