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좋은 시 감상 (532)
오선민 시인의 서재입니다
해변의 묘지를 지나며 외 1편 황경숙 깊고 푸른 거울 속 터널 적도 무풍대를 지난다 숨어있던 구름이 호우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밤 지나온 봄을 시집 속에서 만났다 태풍보다 두려운, 바람 없는 거울은 견고한 벽 새의 깃털에라도 묻어 날아가고 싶은데 수직으로만 불던 바람이 잠잠하다 한 치 일렁임 ..
☛ 서울일보/ 2010.5.21(금요일)자 詩가 있는 풍경 홍매도 부처 연두도 부처 이종암 황사 심하던 어저께 통도사에 갔다 마음과 몸뚱어리 모래먼지 뒤덮인 허공만 같아 대웅전에 줄곧 엎디어 울었다 속울음 실컷 울고 나니 내 허물 조금 보이는 것만 같다 금강계단 뒤돌아 나오다 본 홍매 한 그루 허..
풀밭에서 (외 1편) 조원규 풀잎들이 한 곳으로 쏠리네 바람 부니 물결이 친다고? 아니,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야 그해 팔월엔 어땠는 줄 알아? 풀잎들은 제자리에 미동도 없이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았었지 풀 비린내에 내 가슴은 뛰고 지평선은 환하게 더욱 넓게 시간이 멈추곤 했기 때문이야 이리 와, ..
홍어 이정록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막걸리는 끊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
세숫대야론 김호균 세숫대야를 보면 징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수를 하고 비누거품으로 가득찬 물을 버리면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투로 그려진 세선의 물결 무늬 물 속의 네 육신이 흔들리고 어푸어푸 물먹은 네 육신이 흔들리다 멈추어 섰을 때 지나온 내 꿈보따리를 뒤적이다 보면 나 또한 너..
유턴을 하는 동안 좌회전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좌회전 신호가 없다 지나친다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붉은 신호의 비호 아래 유턴을 한다 들어가지 못한 길목을 뒤늦게 찾아간다 꽃을 기다리다가 잠시 바람결로 며칠 떠돌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목련이 한꺼번에 다 져버렸다 목련나무 둥치 아래 ..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외 4편) 류 근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친구여 나는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당대의 승차권을 기다리다 세월 버리고 더러는 술집과 실패한 사랑 사이에서 몸도 미래도 조금은 버렸다 비 내리는 밤 당나귀처럼 돌아와 엎드린 슬픔 뒤에는 ..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외 1편) 진은영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
〈질마재해오름문학상 수상자 대표시〉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외 2편) 고 영 가늘고 고운 햇발이 내린다 햇발만 보면 자꾸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천둥벌거숭이 자식이라 흉을 볼 테지만 흥! 뭐 어때, 온몸에 햇발을 쬐며 누워 있다가 햇발 고운..